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밀러드 필모어 (문단 편집) == 생애 == [[뉴욕주]]의 통나무집에서 태어났다. 부모가 재봉사였기에 어렸을 때 옷감 제작 기술을 배워 재단 견습을 했다. 고등학교 졸업 이후인 [[1819년]]부터 판사 월터 우드의 밑에서 법률을 공부했으며 결혼 후에는 버팔로 시에서 변호사로 사회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뉴욕 주 [[민병대]] 여단장으로 복무하기도 했다. [[1828년]] 주의원으로 선출된 것으로 정치에 발을 들이게 되었으며, 그 후 하원의원으로 6년간 재직하다가 [[1844년]] 뉴욕 주지사에 도전했지만 패하였다. 대신 회계감사관이 되어 뉴욕의 금융 시스템 개선을 위해 노력하였고 1848년 [[미국 부통령|부통령]] 후보로 지명되었다. 필모어를 내세워 인구가 많은 [[뉴욕주]]의 지지를 받는다는 전략이었고, 덕분에 그는 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런데 취임한지 1년여 만에 [[재커리 테일러]] 대통령이 '''사망하고 만다.''' 부통령이었던 필모어는 대통령직을 승계해 미국의 제 13대 대통령이 되었다. 대통령이 되자마자 중요한 문제를 결정해야 했는데 [[1850년]]의 타협안과 도망 노예법이 그것이었다. 그는 [[재커리 테일러|테일러]]에 비교해서 [[노예]]제에 관대해 보였지만, 실제로는 노예제에 관대하다기보다는 전형적인 도그페이스 북부 정치인으로써, 노예제가 도덕적으로 악하기는 하지만 연방정부가 규제할 사항이 아니라는 시점을 견지했다. 그는 부통령 시절 1850년 대타협에 대한 토론을 상원의장으로써 주재했고, 대통령인 테일러에게 만약 표가 50 대 50으로 갈린다면 타협에 찬성할 것이라 통보한 바 있다. 그래서 그는 대통령이 되자 1850년 대타협에 서명한다. 그렇지만 이 법은 문제가 있었는데, 도망 노예법은 남부의 노예 소유주가 맘대로 남의 주에 들어와 노예를 다시 잡아갈 수 있게끔 한 법이었다. 이에 대항해 북부가 이러한 노예주들이 들어오지 못하게끔 하는 법을 만드는 등 아수라장이 되자, 결국 이로 인해 북부의 지지를 잃게 되어 재선을 위한 두 번째 대선 후보가 되는 데 실패했다. 한편 그의 외교 정책은 기존과 달리 [[태평양]], 특히 [[아시아]]에 치중되어 있었다. [[매튜 페리(군인)|매슈 페리]] 제독을 [[에도 막부|일본]]에 파견하여 [[쿠로후네 사건]]으로 일본을 강제 개항시킨 게 대표적이다(다만 일본과의 조약은 후임자인 [[프랭클린 피어스|피어스]] 때 체결되었다). 또한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가 [[하와이 왕국]]에 관심을 보이자 [[먼로 독트린]]을 내세워 막아버렸다. [[미국 국회의사당]](캐피톨)을 지금의 모습에 가깝게 증축하도록 명령을 내린 인물이기도 하다. 그 유명한 돔이 바로 그의 시대에 설계되었고, 이후 십수년의 세월을 걸쳐 완성되었다. 백악관을 떠난지 3년 뒤인 [[1856년]] [[휘그당(미국)|휘그당]] 내 개혁파들이 [[공화당(미국)|공화당]]으로 떠나버리고 [[미국당]]의 후보로 출마했지만 표를 분열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하였다. 이 선거에서도 패한 휘그당은 결국 역사 속으로 사라짐에 따라 그는 마지막 휘그당 출신 대통령이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